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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한국 | 김달진 미술자료관장

관리자

"화단의 희귀자료 내 손 안에 있소이다"
김달진 미술자료관장
단행본·작가화집 6500여 권·정기간행물 2500여 권
30년간 미술자료 모은 맹렬 수집광

주간한국 2008. 4.22


국내 미술계에서 ‘김달진’이라는 이름을 모르고서는 뭐 하나 쉽게 되는 일이 없다. 그의 정보력을 빌면 단번에 해결될 일도 무턱대고 혼자 뛰면 곱절 힘만 빠진다. 게다가 아무런 댓가도 요구하지 않는 자상한 고급정보다.
‘미술계의 마당발’ 김달진(53) 미술자료관장. 전시와 작품에 대한 각종 자료는 물론, 작가, 평론가, 미술사가, 큐레이터 등 관계자 신상정보에 이르기까지 미술에 관한 한 이만한 정보통이 없다.

자료수집 30년째. 최근엔 크게 축하받을만한 일도 하나 생겼다. 지난 3월, 8년간 공들여 꾸려온 자신의 미술연구소가 마침내 정식 박물관(2종 전문박물관 제58호)으로 서울시에 등록된 일이다. 몇주전엔 이를 기념한 감격의 선물까지 스스로 장만했다.

오래전부터 한 고서점 사이트에서 발견한 뒤 내내 눈독만 들이다 이참에 큰 맘 먹고 사들인 자축 기념물이다. 한 외국 시립도서관의 낙인이 생생한, 1929년도 초판본 영문 희귀 고서다.

“ 처음 포장을 뜯을 때 너무나 설레고 흐뭇했어요. 그러면서도 워낙 큰 돈을 주고 산거라 한편 부담도 컸죠. 사실 지금 우리 형편으론 이것도 굉장한 거금이거든요.”

구입액은 100만원. 무욕,청빈의 김관장으로는 아닌게 아니라 대단한 ‘출혈’이었다.

■ 미술자료만 눈에 띄면 오려내

도서관을 연상케하는 그의 박물관은 국내외 미술관련 희귀자료의 보고다.

1928년판 국내 서화가의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을 비롯해 단행본 및 작가화집이 6,500여권, 정기간행물 2,500여권, 미술학회지 200여권, 논문 150여권, 팸플릿 1만여점, 작가별로 분류된 개인 자료파일 280여권, 그리고 1970년대부터 시작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각 일간지에 게재된 관련 기사자료까지 합치면 수만점의 자료가 소장돼 있다.

온라인 사이트 달진닷컴(www.daljin.com)은 더욱 유명하다. 하루 이용자만 약 1,000명선. 단골이용자가 전국에 걸쳐 포진해있다. ‘정보 유료화’ 시대도 무색하게 누구에게든 인심좋게 자료를 퍼준다.

“제 개인을 떠나 일반인들과 함께 정보를 공유한다는 것에 가장 큰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남들과는 다른 의미의 수집을 했다는 것,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제 천직으로 임했다는 것, 그래서 더욱더 많은 분들이 인정해주고 이 일도 빛을 발할 수 있었던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의 유별난 수집벽은 중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우표수집부터 출발했다가 얼마뒤 그림으로 눈을 돌렸다. 미술 화보집도 보기 힘들던 시절, ‘여원’ 등 당시 유행하던 여성지에 매달 한번씩 실리던 명화 페이지를 보고는 이를 뜯어 색 도화지에 붙이기 시작했다.

수집벽 못지않게 정리벽도 투철한 김 관장. 수집 초기에도 오려붙인 명화를 르네상스, 바로크 등 각 화파별로 분류해 각기 다른 색상의 도화지로 분류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도화지 뭉치가 제법 묵직해 질 즈음 ‘한국근대미술 60년전’을 만났다. 1972년 당시 경복궁 내에 있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특별전이었다.

이중섭, 이상범 등 국내 근대미술의 대가들의 작품을 그때 처음 실컷 볼 수 있었다.

이후 서양명화에서 손을 넓혀 우리나라 근대작가들의 자료도 수집하기 시작했다. 도록에서 오린 손톱만한 사진도 신주단지 모시듯 켄트지에 붙여넣었다. 관련된 신문기사는 물론 도판, 작품 기사, 전시회 소식 등 국내 작가 자료도 보이는대로 모두 오리거나 복사해 모았다. 은행이든 어디든 가는 곳마다 무슨 책자만 눈에 띄었다하면 가만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단 한 장의 사진을 얻기 위해 별 필요도 없는 잡지를 매주 사들이기도 했다. 주간한국의 역사도 그에겐 남다른 인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가 펼쳐보여준 한 파일 안에는 1989년 1월, 당시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치른 고 이응로 화백의 모습과 타계 소식이 전면을 차지한 당시 주간한국 표지가 한 페이지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 그땐 어른들이 저를 보면서 ‘신문 쪼가리나 오려서 어디 나중에 밥이나 먹고 살겠냐’고들 하셨죠. 사실 저 자신도 그런 고민을 했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이 사회에도 도움을 주는 일이라는 신념으로 계속 손을 놓지 않았어요.”

■ 금요일의 사나이, 시말서 쓴 사연.

1978년 미술잡지인 월간 ‘전시계’사를 첫 직장으로, 이후 1981년부터 약 15년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근무했다. 당연히 자료실을 사수했다.

“ 당시 제가 밖에 나간다고 하면 그냥 놀러가는 줄 알고 다들 말리는거예요. 그걸 한참 설득해 이해시킨 뒤 그후 십몇년동안 매주 금요일이면 어김없이 가방을 메고 나가 자료를 수집해 들어오곤 했어요. 그래서 얻은 별명이 ‘금요일의 사나이’였어요. 굳이 금요일에 나간 건 당시 전시행사들의 일정상 가장 행사장이 한산하고 남들 방해없이 자료를 구하기 좋은 때가 금요일이었거든요.”

1989년부터는 본인도 ‘자료’가 되었다. 자료수집 전문가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 뿐만 아니라 그간 모은 자료를 데이터삼아 직접 미술계의 문제점을 통찰하고 지적하는 비판적인 글을 발표하면서 더욱더 언론의 공감과 주목을 받았다. “미술정보=김달진”의 등식이 형성된 것도 이때부터다.

1985년 선미술지 겨울호에 발표한 ‘관람객은 속고있다’는 제하의 기고문은 특히 그의 날카로운 시각과 정확하고 풍부한 데이터베이스를 세상에 확인시킨 제1탄으로 유명하다.

“ 그후에도 ‘미술정보의 생산 관리를 위한 제언’, ‘누가 역사를 그르치는가’, ‘미술 공모전의 문제점’ 등 많은 비판기사들을 썼어요. 주로 미술계 전체 흐름에 대한 비판이나 현상을 짚어내는 글들을 주로 썼죠. 한때는 이 때문에 ‘자꾸 문제만 들추는 사람’으로 오해를 받은 적도 있어요. 그런게 아닌데....”

언론 등 세상에서는 그의 정직한 쓴소리를 대대적으로 환영했지만, 내부적으로는 공직에 몸 담은 신분상 이로 인해 시말서를 쓴 적도 있다.

“ 문제가 된 건 미술관의 자료센터 설립을 주장하는 글이었는데 그나마 관내 신문에 쓴 거라 시말서 정도로 무마됐지요. 저, 그때 참 용감했습니다(웃음).”

2001년 가나아트센터 총괄팀장을 끝으로 직장생활을 접었다. 같은 해에 김달진 미술연구소를 개소, 그간 꿈꾸었던 일들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2002년에 창간한 월간지 ‘서울아트가이드’는 지금까지도 그가 가장 애틋하고 자랑스레 여기는 대표작이다. 처음엔 약 8쪽의 초간단 접지형 잡지로 시작해 현재는 약 160쪽 분량의 인기 월간지로 어엿이 키워냈다. 여느 화려한 월간지 이상 내용이 알차고 전문적인 고급정보지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무료로 나눠주는 무가지. 순전히 광고 수익으로 만들어 일반 독자들에게 사심없이 정보를 제공하는 셈이다.

“ 자료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없어요. 제가 가진 정보를 다함께 공유해야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죠. 그래도 워낙 살림이 빠듯하다보니 한편에선 이제 1천원짜리 유가지로 가 보자고도 하지만 제겐 아직도 물음표 상태예요. 차라리 돈을 덜 벌더라도 보다 많은 이들이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제겐 더 의미있어요.”

날카로운 필치와는 달리 실제 품성이 워낙 반듯하고 호인이라 ‘미술계의 신사’로도 통하는 김 관장. 접지형 월간지 창간시절엔 그 심성 탓에 마음 고생이 더 컸다.

“ 아는 작가들에게 전화해서 ‘곧 전시회 하시지요?’하며 광고 얘기를 꺼내자니 쑥스럽기도 하고, 자존심도 너무 상하고....거절도 많이 당했죠. 지금이야 워낙 브랜드 가치가 쌓여서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이 광고가 자연스레 해결되고 있지만, 초창기엔 정말 힘들었어요.”

■ 아직도 미공개 자료가 가득한 김달진의 꿈.

지난 3월부터는 격월간지 ‘아트맵’을 국,영문판까지 창간해 또한번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관장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자료수집가, 평론가, 발행인, 취재기자 등 초인같은 1인다역을 소화해내고 있다.

아쉬운 건, 자료는 나날이 늘어가는 반면 이를 비치할 공간이 없다는 점이다. 게다가 현재 서울 종로구의 한 건물 지하에 마련된 박물관 한쪽 천장에선 물까지 뚝뚝 떨어진다. 건물주에게 보수공사를 당부해놨지만, 행여라도 습기로 인해 고귀한 자료들이 훼손될까 그의 가슴을 내내 졸이게 한다.

“ 제 고향 충북 옥천에도 4.5톤 분량의 자료가 더 있어요. 그것도 10여년째 계속 방 안에 쌓아둔 상태라 그새 자료의 종이가 서로 붙진 않았을까 내내 불안해요. 공간만 더 있다면 빨리 옮겨서 자료를 합칠텐데....”

하루빨리 더 넓은 공간으로 옮기는 것이 김 관장의 소망. 한 개인으로서 해결할 수 있는 경제력의 한계를 요즘따라 나날이 절감하고 있다.

“대신 국가나 기업 등이 나서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텐데, 그 점이 아쉬워요. 예를 들어 인사동에 미술종합정보센터 같은 것을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지요. 가령 거리상 직접 광주 비엔날레 행사장까지 갈 수 없는 사람이라도 그 센터에만 가면 현지 행사의 관련 도록이나 팜플렛, 책자 등을 볼 수 있게 한다면 더없이 훌륭한 국가적 정보창구가 되는 셈이죠. 그런 곳만 생긴다면 저는 기꺼이 제 자료를 내놓고 공유화할거고요.”

이 인심 야박한 세상을 거꾸로 살아가는 김 관장네 박물관은 일주일에 세 번, 월,수,금요일에만 문을 연다. 불만스럽긴 하지만, 박물관 형편이 벅차다보니 아껴서 쓸 밖에. 거의 앉을 자리도 없이 서가로 빽빽한 그의 박물관 자료들을 번듯한 인사동 정보센터에서 다시 만날 날을 무턱대고 기다려본다.

■ 김달진은…

1993년 서울산업대 금속공예과 졸업. 1999년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화예술학 석사 학위 취득. 국립현대미술관 근무(1981-1996), 가나아트센터 자료실장, 총괄팀장(1996-2001), 김달진미술연구소장(2001-2008), 한국미술협회 행정분과위원장(1997-2002), 문광부 박물관 및 미술관 정책자문위원회위원(1999-2000), 대전시립미술관 운영자문위원(2007-현재), 문화부장관 모범공무원 표창(1992), 월간미술대상 특별부문상 수상(1997), 한국신지식인으로 선정(1999), 저서 ‘바로보는 한국의 현대미술’


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
사진 임재범 기자 happyyj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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